지속적인 두통 방치 말고 신속히 진찰받아야
만성 경막하 출혈 (Chronic Subdural Hematoma)
부씨 할머니(72)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왼쪽 팔이 잘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남편을 부르러 침대를 내려오는데 다리마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며칠 동안 머리가 아프더니, 내가 중풍이 생겼구나. 119를 불러 뇌경색 치료를 잘 한다는 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하자 역시 뇌경색이 의심되며, 급하게 MRI를 촬영하고 경우에 따라서 뇌혈관 시술을 하여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하지만, 마비는 영구적으로 남을 수 있다며 겁을 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MRI 검사를 한 후 만난 신경외과 의사는 뜻밖에도 빙긋이 웃으며 손을 잡아준다. "최근 한 한달 사이에 머리를 다치신 적 있으신가요?" 부씨 할머니는 한달 전에 한눈을 팔다 방문에 머리를 부딪힌 일을 기억해 냈다. 최근 한 주 동안 머리가 아프기는 하였으나, 머리를 부딪혔던 그 다음날부터는 한동안 두통이 없어 연관 지을 생각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피가 약간 고였네요. 구멍을 조그맣게 뚫어서 피만 빼 주면 좋아질 겁니다." 부씨 할머니는 머리에 관을 넣는 간단한 수술을 받은 후 그날 오후부터는 두통도 좋아지고, 마비도 빠른 속도로 풀려서 일주일 후 퇴원할 수 있었다.
두통, 어지럼증, 마비 증상이 있으면 누구나 뇌경색을 의심한다. 옳은 생각이다. 이런 증상이 모두 뇌경색인 것은 아니지만, 뇌경색은 치료의 골든 타임이 있으므로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환자들이 만성 경막하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몇몇 특이한 혈관 질환이나, 머리 수술을 받았다거나 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만성 경막하 출혈은 외상으로 생긴다. 다만 이 질환의 경우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소 특이한 발생기전 때문이다.
경막하 출혈에서 '경막하'라는 말은 '경막의 아래'라는 뜻으로, 경막이란 두개골 안쪽에서 뇌를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단단하고 질긴 막을 의미한다. 마치 뇌가 경막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것과도 같다. 경막하 출혈이란 뇌와 경막 사이에 출혈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머리를 크게 다치며 뇌와 경막을 연결하는 정맥이 찢어져 발생한다. 그래서 환자는 머리를 다친 이후에 바로 심한 두통이 생기거나 의식이 나빠지는 등 신경학적 증상이 생겨 응급실을 찾게 되며, 이러한 경우를 '급성' 경막하 출혈이라고 한다. 급성 경막하 출혈은 혈관이 찢어졌으므로 갑자기 많은 양의 뇌출혈이 생기고, 즉각적으로 뇌를 압박하여 환자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성 경막하 출혈은 이와는 다르다. 우리가 어딘가를 부딪히면 빨갛게 부으며 충혈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상처받은 조직을 치료하기 위해 염증반응이 일어나며 피가 몰려서 생기는 현상이다. 뇌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데, 머리를 다친 후 경막에 타박상이 생기면 이곳에 염증반응이 생기며 충혈된다. 이때 다친 곳을 치료하기 위해 갑자기 몰린 혈관들은 정상혈관에 비해서 약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쳐 찔끔찔끔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만성 경막하 출혈의 초기 증상은 점차 심해지는 두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진단이 늦어지는 것은, 머리를 다친 시점과 두통이 시작하는 시점간에 며칠간의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를 다친 그날은 당연히 머리가 아플 것이다. 이는 단순 타박상 때문이다. 딱밤을 맞았다고 며칠 동안 아프지는 않는 것처럼, 타박상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좋아진다. 그리고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는 피가 조금씩 새는 것이다. 급성 경막하 출혈의 경우야 갑자기 출혈이 많이 생기니 금방 증상이 나타나겠지만, 만성 경막하 출혈은 찔끔찔끔 나온 피가 상당한 양이 되어 뇌를 누를 때까지 며칠 동안 흘러야 비로소 증상이 생기는 것이다.
만성 경막하 출혈의 진단이 늦어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출혈이 생기기 위해서 반드시 머리를 크게 다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급성 출혈은 뇌의 혈관이 찢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지만, 만성 출혈은 아주 약하게 '탁' 하고 부딪히는 정도로도 생길 수 있으므로, 몇 주 전의 경미한 부상과 지금의 두통을 연관 짓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실제로 환자를 만나 머리를 다친 적이 있는 지를 물어보면 40년 전에 감나무에서 떨어졌던 얘기, 70년 전에 가마에 부딪힌 얘기 등을 기억해 내지, 보름 전에 찬장에 머리를 살짝 받았던 일을 먼저 떠올리지 않기 마련이다.
만성 경막하 출혈은 노인 환자들에게서 더 많이 발생하고 진단 또한 더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 노인들이 사소한 신체적 불편함에 대해 덜 민감하다는 것 외에도 젊은 사람에 비해서 뇌 위축이 심한 것이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뇌는 그 크기가 작아지며, 그렇다고 해서 머리 크기가 작아지지는 않으므로 두개골과 뇌 사이에 빈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량의 피가 고이기 전까지는 크게 증상을 호소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수주일 전의 가벼운 머리의 부상은 잊혀진 후라서 신경성 두통으로 여기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한쪽 뇌가 심하게 압박을 받아 마비 증상이 생긴 후에야 병원을 찾기 일쑤이다. 두통을 방치한 경우 출혈량 증가에 따라 두통의 빈도나 정도는 심해지며, 경막하 출혈이 좌측이나 우측, 어느 한쪽에 발생했다면 점차 반대쪽의 팔다리의 마비 증상을 겪게 되는 것이다. 뇌의 압박이 심한 경우에는 경련을 하기도 하는데, 약물치료를 하지 않고 지켜본 만성 경막하 출혈 환자 중 15%정도가 경련을 했다는 보고가 독일에서 나온 바 있다.
진단은 뇌 CT나 MRI 촬영으로 할 수 있다. 약을 먹어도 잘 조절되지 않는 두통이나 사지의 마비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경우 대부분이 둘 중의 한 가지 검사는 하게 되므로, 일단 병원에 오게 된다면 진단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다. 다만 증상 자체가 서서히 진행하고 모호한 경우가 많아 병원에 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일반적인 신경성 두통과 비교한다면, 만성 경막하 출혈의 두통은 아주 심했다 좋아졌다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지속적으로 점차 심해지는 두통의 양상을 보인다. 급성 뇌출혈과의 차이라면, 두통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만성 경막하 출혈은 아주 응급한 치료를 요하지는 않으나, 마비 증상이나 의식이 나빠지는 등의 증상이 보이는 경우에는 상당히 진행한 것이므로 서둘러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만성 경막하 출혈은 그 양이 적을 때에는 지혈제 등 약물 치료를 하며 저절로 흡수되어 없어지기를 지켜볼 수 있으나, 양이 점차 늘거나 증상이 심한 경우는 수술적 치료를 필요로 한다. 이때, 출혈된 피는 액체 상태로 녹아있기 때문에 두개골에 작은 구멍을 내어 도관을 넣은 다음, 이를 통해 고인 피를 빼내는 비교적 간단한 수술로 치료할 수 있다. 갑자기 많은 양이 흘러나와 선지와 같이 굳어져 있는 급성 경막하 출혈의 수술을 위해서 두개골을 크게 절제하고 혈종을 걷어내야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수술을 받으면 두통이나 마비 증상은 대부분 호전을 보인다. 다만 만성 경막하 출혈은 특히 노인에게서 재발하는 경향이 있는데, 수술 후 도관을 제거한 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지혈제 및 항경련제 복용을 해야 한다. 다만, 만성 경막하 출혈이 노인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것을 감안했을 때 지혈제의 사용은 재발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나, 심장 질환이나 뇌혈관 질환이 동반되어 아스피린이나 와파린 같은 항혈전제나 항응고제를 사용해야 하는 환자에게는 기존 약물과 충돌하여 곤란한 상황들이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선택적으로, 출혈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뇌 혈관을 혈관 내에서 막아버리는 혈관 색전술도 시행하고 있다.
만성 경막하 출혈은 제대로 진단만 되면 비교적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재발률이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 증상이 급작스럽지 않아 병원을 늦게 찾는 경향이 있다. 뇌혈관 질환들에 비해 응급을 요하지는 않지만 오랜 기간 방치해서 경련을 하거나 마비가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에는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 머리에 가벼운 부상을 입은 후라도, 보름 정도 후부터 예전에 없던 두통이 생기고 있다면 의사를 만나 진찰을 받아보는 것을 권한다.
<백진욱 신경외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