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인조혈관 이용한 혈관 우회로술로 다리 살려내
L씨는 50대 였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해서 버는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는 40대 때부터 당뇨가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셨고 그렇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했지만 별 증세도 없었고 당장 큰일 날 일이 일어날 것도 아닐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었다. 처음에는 생활하는데도 지장이 없었다. 1년 전 부터 조금 오래 걸으면 종아리가 당기고 쉬면 곧바로 괜찮아지는 현상이 밤에 쥐가나거나 발이 시린증세와 함께 나타났다. 나이가 들어서 그러려니 생각하고 그것 역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집 앞 슈퍼마켓에 가다가 보도에 발등을 긁히면서 작은 상처가 났다. 집근처 병원에서 상처소독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이후 상처는 낫기는커녕 점점 커지고 악화되어 갔다. 집에서 소독만으로는 안될 지경이 되어서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혈관에 문제가 있으니 큰 병원엘 가보시라는 권유를 받았고 L씨는 유명하다는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다. 거기서 이런 저런 검사를 한 후, 당뇨와 말초혈관 합병증으로 이미 다리가 썩을대로 썩어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다리를 자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들었다. 하지만 L씨는 그럴 수 없었다. 다리를 절단하면 당장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고 그것은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진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리 상태를 숨긴 채 두어달을 더 직장에 다녔지만 결국 살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으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제서야 L씨는 당뇨치료를 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 하였다. L씨는 썩어들어가는 다리를 자르지는 못한 채 걸을 수도 없어 휠체어에 의지해 지내며 진통제만 복용하다가 이번엔 진통제 과다복용으로 병원에 실려왔다.
의과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첫 강의를 할 때마다 필자는 “생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매년 던졌다. 의대를 다니는 동안 지나칠 만큼 미시적이고 지엽적인 분과에 매몰되다 보면 정작 궁극적인 물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대사(metabolism)가 이루어진다“, ”생식을 통해 자손을 얻는다“ 혹은 ”세포라는 기본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와 같은 조금 어려운 특징들도 있지만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정말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답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탄생과 죽음“이다.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함께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개체의 종말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한 개체는 한번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개체를 이루는 세포들은 수많은 탄생과 죽음을 반복한다. 예를들면 사람의 피부세포는 약 30일을 살다가 죽고 적혈구는 약 120일동안 생존한 후 죽는다. 즉 매일 피부의 1/30이, 적혈구의 1/120이 새로 태어나며 죽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쌓인 죽은 피부세포더미가 바로 우리가 목욕탕에서 밀어내는 ”때“다). 신비롭지 않은가? 개체를 살리기 위하여, 혹은 개체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체를 구성하는 단위세포들은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세포로서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생명체 진화의 꽃잎과도 같다. 개체를 종족으로 조금 확대 해 보면, 역시 개체의 죽음을 담보로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종족은 진화하며 유지된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어쩌면 개개인의 죽음은 인류라는 종족의 더 나은 진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이 이러한 생과 사의 변화를 오차없이 수행하야 하기에 우리는 깨끗한 공기를 마셔야 하고,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 하며 적절한 운동과 충분한 휴식과 같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행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는 동안 잘못된 돌연변이로 인해 암세포가 만들어지거나 건강하지 않은 세포로 인해 기능에 장애가 생긴다. 이부분에 있어 현생인류는 최근 2-3백년 사이에 치명적인 환경 변화를 겪고 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8억년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산소가 미미했던 20억년 전 원시 지구에 처음 산소를 뿜어내준, 그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준 미생물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남조세균 스토마톨라이트이다. 이로부터 15억년이 흘러 약 5억년 전 고생대 때 비로소 대기중 산소농도가 20%이상이 되면서 온갖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발생, 진화되기 시작했다. 현생인류가 분화되어 이 땅에 선 것이 5만년 전. 까마득한 옛날 같지만, 지구의 나이 48억년을 24시간이라고 했을 때, 현생인류의 출현은 불과 0.8초 전에 불과하다.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오랜 시간동안 환경과 연관된 유전정보들이 인류의 몸 속에 저장되어 있고, 그것에 맞춰 기능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느릿느릿한 생물학적 진화와 급격한 문명의 발전으로 충돌하는 인체 생리적 변화의 현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예를들어 보자. 포유류 가운데 30년 이상을 자연상태에서 생존하는 동물은 극히 드물다. 최근들어 문명국가의 수명이 70세를 넘기고 있지만 불과 수백년 전만 하더라도 근대국가의 평균수명은 40-50세를 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해부조직학적으로도 유추가능하다. 일반인들은 혈관의 동맥 경화가 적어도 성인 혹은 중년이 되어서야 발병한다고 알고 있지만 조직학적 검사를 해 보면 평균 5세경 부터 동맥경화가 사람의 몸에서 생기기 시작한다. 만약 동맥경화증이 노화와 관련된 생명현상이라면, 인간의 몸은 다른 동물들처럼 4-5세 부터 노화가 진행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는 우리 몸 속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이런 인간의 자연적 환경을 뛰어넘은 근현대 인류의 평균수명 증가는 그야말로 의학의 발전에 순전히 기인한다. 대표적인 예가 영유아 사망율의 감소, 백신을 포함한 항생제의 발견, 수술요법의 발달 등이다. 최근 100여년동안의 급격한 의학의 발달은 수명의 연장이라는 축복을 안겨주었지만 비례하여 노화와 관련된 수많은 질병들의 문제를 대두시켰다. 즉, 인간의 본성과 달리 의학의 발달로 수십년을 더 살게 되면서 우리몸은 전에 없는 노화라는 문제와 싸우게 된 것이다. 근현대화가 우리몸의 대사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생각해보자. 원시시절, 조상들은 수렵이나 채취를 통해 에너지원을 섭취했다. 먹을것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우리의 몸 속에는 당장 사용할 에너지원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저장해 버리려는 경향이 뚜렷했고 이를 위한 대사과정이 언제나 활성화 되어 있다. 이는 모든 동물들에게서 공통적인 현상이고 거의 예외없이 지방이라는 효율 좋은 저장형태로 몸 곳곳에 비축한다.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 물질문명의 발달과 생산의 증가는 인간에게 먹고 살기위해 들판을 뛰어다닐 필요성을 순식간에 줄여버렸다. 과거보다 훨씬 수월하게, 더 맛있는 것을 더 배불리 먹게 된 인류. 하지만 불행히도 수억년의 진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저장 본능의 시스템을 불과 수백년 동안에 변화시킬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남는 에너지원들 (당, 단백질, 지방)의 처리를 위해 간과 콩팥, 췌장등이 이전에 없던 혹사를 당하고, 무조건적으로 저장하려는 진화적으로 고착된 원리에 의해 피하에, 간에, 심장과 혈관에 지방과 대사 과정의 노폐물이 침착된다. 아시다시피 이로 인하여 현대인류는 성인병이라는 새로운 질병에 고통받게 되었다. 우리 몸 구석구석 혈관이 없는 곳은 없기에, 동맥경화라 부르는 혈관내 죽상경화반은 암과 더불어 현대인의 주요 사망원인인 뇌경색, 심근경색 및 협심증 말초혈관 폐색증의 직접적 원인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몸은 셀 수 없는 시간동안 쌓인 진화에 의한 생리적 특징을 가진다. 세포는 주기적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재생산된다. 이 과정을 잘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오염되지 않은 음식을 먹고, 몸속의 어떤 생리적 과정이 과도하게 일어나거나 차단되는 것을 방지하면 된다. 이를테면 과식을 하지 않음으로써 혈중 콜레스테롤 레벨이나 당뇨를 조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부분이 의학에서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방의학이다. 질병이 발생하기 전에 막아보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최근 신문을 통해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여자의 경우 무려 85세를 넘어섰다는 결과가 발표되었다. 여러 가지 분석이 있겠지만 필자는 지난 이십여년 동안 꾸준하게 발전해온 국가적인 건강검진, 관리 사업, 국민생활습관 개선의 긍정적 결과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예방의학만으로 질병의 발생율을 줄이지는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고기를 적게 먹거나 다이어트를 하면 혈중 콜레스테롤을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물론 대사량이 활발한 젊은이들은 어느정도 과식을 하더라도 혈중지방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년이후로 넘어가면 기초대사량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야기가 달라진다. 중년이후에는 식이요법을 통하여 조절가능한 지질 수치가 전체의 30%를 넘지 못한다. 즉, 70%의 콜레스테롤은 약의 도움 없이는 조절이 불가능하다. 우리몸의 유전자가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대표적인 성인병인 고혈압, 당뇨등에서도 조절기전에서 모두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성인병은 악화되면서 몸을 이루는 세포와 기관의 기능을 서서히 망치면서 죽여간다.
우리의 몸이 유전적, 생리적으로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기적인 검진과 생활습관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약물 혹은 기타의 치료를 통하여 더 무서운 질병으로의 악화를 막고 질병의 진행을 느리게 할 목적으로 치료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병이라 불리우는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은 인간이 노화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율이 증가하고 장기기능의 악화를 가져온다. 이를테면 오래된 당뇨로 인해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미세한 혈관들이 좁아지고 이로인해 다리가 썩는... 그래서 성인병을 소리없는 암살자라 부르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응급실에서 L씨를 본 것은 그가 고통에 겨워 마약성 진통제를 한웅큼 삼키고 응급실에 실려왔을 때 였다. 걸을수 없게 된 환자의 다리상태를 본 응급의학과 선생이 기겁을 해서는 심장과 말초혈관 전공인 필자에게 부랴부랴 연락을 한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부인으로부터 듣고는 말못할 측은함이 밀려왔다. 우리시대의 평범한 얼굴을 한, 무거운 어깨를 늘어뜨린 한 가장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하면 그의 다리를 예전처럼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였다. 필자는 오랜 당뇨로 쪼그라든 동맥혈관에 환자의 정맥을 이용해서 혈액을 재공급할 수 있는 우회술을 해보기로 하고 그와 상의 하였다. 성공했을 때는 다리를 살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어쩌면 발목 뿐만 아니라 무릎까지도 절단을 감수해야 할 처지였다. 더군다나 기술적으로는 자신이 있다해도 이미 망가져버릴대로 망가진 그의 혈관구조가 수술을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해 하였다. 서울의 S 병원에서도 그 때문에 다리를 살리기를 포기하고 절단을 권유했던 터였으니... 하지만 나는 그 한사람 뒤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보면서 우리의 혈관 우회로수술이 잘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최고의 컨디션으로 환자의 반대쪽 정맥과 인조혈관을 모두 이용하여 환자의 장골동맥에서 발등동맥으로 우회술을 진행하였다.
수술 후 첫 한달동안은 환자가 더 아파했다. 원하던 타겟혈관에 정확히 붙였기 때문에 죽어가던 신경이 재생되고, 새살이 돋으면서 생장통이 생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을 더 환자에게 달라붙었다. 음압치료와 함께 필요시 줄기세포 치료까지 고려하였다. 6개월 후 환자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환자는 건강한 모습으로 두다리로 걸어 외래로 가족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이제 다시 걷고, 취직을 했으며 열심히 당뇨를 조절하고 있다.
종족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 개개인은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다른 생명체와 달리, 우리 인간은 사유하고, 느끼며, 교감하는 형이상학적 특별함을 지닌다.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특별함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육체의 건강이 허락할 때 비로소 기본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우리들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있다. 그때까지는 건강한 삶을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그것이 가족과 주위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도리니까. 그리고 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