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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 정보

의식·지남력에 기복 심해 ··· 적절한 치료 힘들어
작성일 2021.12.27
조회수 115

중증외상환자의 섬망

 

중환자실 입원 환자 중 70~80%에서 발현될 정도로 많아

환자에게 친숙한 환경 조성, 편지 쓰기 등 가족 참여로 극복 

 

지난 8월, 50대 남자가 트럭과 트럭의 충돌사고에서 운전대와 운전석 시트 사이에 끼인채로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환자는 곧장 권역외상센터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검사결과 외상성 쇽, 다발성 늑골 골절, 혈흉, 혈복강, 간열상, 췌장절단, 대퇴골 및 슬개골 골절, 안와골 및 비골골절 등이 발견되었다. 진단명만 열거하기에도 숨이 찰것 같은 손상을 입은 환자는 응급수술 후 중환자실로 입원하였다. 보통 이런 다발성 외상환자들은 한 번의 수술에서 모든 부위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한다. 더불어 다발성 늑골 골절 및 혈흉, 혈복강은 호흡에 지대한 장애를 주기 때문에 인공호흡기의 이탈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환자는 인공호흡기의 이탈이 가능할 때까지 장기간 중환자실에 입실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섬망이라고 하는 질환에 대하여 들어보았는가? 섬망이란 의식과 지남력(날짜, 장소,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기복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질환이다. 주의력 저하, 언어력 저하 등 인지 기능 전반의 장애와 정신병적 장애가 나타난다. 섬망은 혼돈과 비슷하지만, 과다행동(안절부절못함, 잠을 안 잠, 소리 지름, 주사기를 빼냄)과 생생한 환각, 초조함, 떨림 등이 자주 나타난다. 섬망은 전체 입원환자의 10~15%, 중환자실 입원환자의 70~80% 가량에서 나타날 정도로 흔한 질환이다. 섬망의 원인은 다양하다. 어쩌면 병원에 입원하는 모든 질환에서 발생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 흔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수술 후, 고령, 두부외상, 약물(술도 약물이다) 중독 또는 약물 금단 상태 등이다. 일단 섬망이 발생한 후에는 치료가 쉽지 않다. 환자는 치료에 협조가 되지 않고 몸에 부착된 치료장치들(인공호흡기, 수액관, 배액관등)을 수시로 제거하려들고 침상에서 낙상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경우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은 진정제를 투여하고 억제대를 사용하여 환자를 구속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치료 유지를 위하여 적용한 진정제와 억제대는 섬망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섬망의 치료에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섬망을 유발한 원인 질환을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한 환자처럼 다발성 외상등으로 인하여 원인 질환의 치료가 하루 이틀에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치료는 환경 요인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는 환자에게 친숙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낮과 밤을 구별하여 숙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오늘의 날짜나 상황들을 알려주는 등 현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가족들이 곁에서 간호하며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지만 면회에 제약이 있는 중환자실에서 특히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국에는 더욱 요원한 방법이기도 하다.

 

심폐소생교육을 받아본 일이 있는가? 심폐소생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인 “기도확보(Airway)”, “호흡(Breathing)”, “혈액순환(Circulation)”의 앞글자를 따 “ABC”라고 한다. 중환자의학에서는 치료의 핵심 요소들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머릿글자를 따 “ABCDEF bundle”이라고 한다. 이 중 “F”는 “가족의 참여(Family engagement)”라는 의미로 본래의 취지는 의료진의 회진이나 회의에 가족의 구성원이 직접 참여하여 가족의 소망과 관심, 의문점들을 이야기하고 또한 의료진들이 어떻게 환자의 치료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가를 직접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하여 서로 간의 신뢰를 쌓고 중환자실 재실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Covid-19으로 이 또한 요즘은 어렵다.

 

또 다른 방법으로 “중환자실 일기(ICU diary)”라는 것이 있다. 중환자실에 입실하게 되는 환자의 가족이 일기장을 하나 만든다. 첫 장에는 대체로 환자에 대한 소개를 적는다. 가령 우리 아빠는 친절한 사람이고 빨간색을 좋아하며 여름에는 냉면을 좋아하고 등등… 일단 이 소개 자체가 환자나 의료진에게는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내가 치료에 참여하는 환자가 더 이상 몇 세의 남자 환자가 아닌 누군가의 아버지임을 매일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 후에는 일기의 형식으로 간단한 사진을 첨부하여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 사이에 공동 일기장이 되는 것이다. 의료진은 그 날에 있었던 환자의 변화와 경과 그리고 환자의 사진을 첨부하고 가족들은 그 날에 있었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첨부한다. 나중에 의식이 회복된 환자는 그 일기장을 봄으로써 자신에게 그 간 있었던 일들을 보다 원활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이는 의식 회복 직후의 섬망에도 도움을 주지만 장기간의 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개선에 큰 도움을 준다.

 

다시 처음의 50대 남자 환자로 돌아가 보자. 환자는 1주일 가량의 시간이 지난 후 의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눈만 뜨게 되었을 뿐 의료진의 설명에 눈도 맞추지 못하고 반응이 없는 “정적 섬망(hypoactive delirium)” 상태였다. 이 상태로는 치료에 협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외상의 회복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 때 생각난 것이 “중환자실 일기”였다. 환자의 가족은 큰 도화지에 가족사진을 붙여 편지를 써 주었고 이를 본 환자는 눈물을 흘리고는 처음으로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 후로는 가족들이 보내준 동영상들을 환자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기다리는 이들이 많으니 더 열심히 치료받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독려할 수 있었고 이후의 경과는 순조로웠다.

 

2019년 기준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수명은 83.3세이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오늘 늘어난 수명 만큼이나 병원에 갈 기회 또한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나 고령에서는 중증이 아닌 질환으로도 중증이 되어 중환자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과거의 중환자실이 보호자에게 닫혀 있는 의료진들만의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중환자실은 점점 의료진과 환자, 보호자가 함께 치료를 향해 나아가는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다. 아직은 그 시작점으로 유수의 대학병원들도 원활한 “가족의 참여”나 “중환자실 일기” 같은 것들이 걸음마 단계일 수 있다. 하지만 변화는 시작되었고 누구나가 중환자 또는 그 환자의 보호자가 될 기회가 늘어난 요즘 조금은 다른 중환자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권역외상센터 외상외과 전문의 박정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