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희귀질환 극복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다
희귀질환센터
제주한라병원이 지난 1월 말 질병관리본부로부터 제주권역희귀질환거점센터로 선정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제주지역 희귀질환자들이 관련 정보 및 전문가 부족 등으로 도내 병원을 전전하고 종내는 서울의 대형병원에 가서야 정확한 진단을 받지만 또 사후 관리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불편들이 일정부분 해소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이 지어지듯 병도 발견이 되면 이름이 붙여진다. 대개 끝에 병이나 증후군이라는 접미사가 붙는데, 질환의 빈도에 따라 희귀질환도 있고 다빈도 질환도 있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질환은 많은 사람들이 직접 앓고 있거나 주위에 질환자가 한두 명쯤은 있어서 기초과학의 역사가 짧은 동양권에서도 잘 알려진 병이다. 그에 반해 희귀질환은 별로 접해본 바도 없거니와 대개는 화학이나 생물학이 발달한 서양권에서 먼저 발견되어 병명도 영어나 유럽권 언어로 명명되는 경우가 많아 이름도 생소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희귀질환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희귀질환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는 의학드라마 ‘신의 퀴즈’에서 길렝바레 증후군(신경계 자가면역염증으로 마비에 이르는 병), 본 레클링하우젠 증후군(피부에 여러 개의 유두모양 신경섬유종이 생기는 병)이 소재로 등장했고,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조로증(청소년기에 노년기의 소견을 보이는 병)이 등장하면서 희귀질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면 희귀질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과거 천수답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대하던 희귀질환은 기초의학이 발달하면서 전기를 맞게 되었다. 희귀질환 진료의 물꼬를 연 대표적인 병이 페닐케톤뇨증이다. 페닐케톤뇨증은 1934년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병원 의사인 폴링(Ivar A Folling)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정상으로 태어났다가 정신지체를 보인 아이의 소변에서 특이한 향을 맡고 이상하게 여겨 여러 검사를 해본 후 그것이 페닐피르브산(phenylpyruvic acid)임을 밝혀낸 것이다. 이후 미국의 의사 구쓰리(Robert Guthrie)가 고안한 미생물 억제검사(bacterial inhibition assay)로 쉽게 진단이 가능해졌고 이 검사는 북미와 유럽에서 주로 쓰이다가 1980년대 국내에 도입되어 희귀질환 진료의 향상을 가져왔다.
이 질병은 페닐알라닌이라는 아미노산을 분해하는 효소(phenylalanine hydroxylase)가 부족해서 생기는 병으로 현재는 페닐알라닌을 뺀 특수식이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정신지체, 간질 등을 보이는 기이한 병을 페닐케톤뇨증으로 진단하고 치료하는 성공적인 사례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희귀질환의 극복에 대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꾸준히 진행되어 왔고 한국도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노력이 계속되어 지난 2015년 말에는 희귀질환법이 제정되었다. 특별히 제주의 경우 안과영역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인구대비 희귀질환 발생률이 전국에서 가장 높다는 2015년도 연구보고도 있었다.
이번 2019년도에 희귀질환 거점병원이 전국 10개 기관으로 확대되며 제주에서는 제주한라병원이 거점센터를 맡게 되었다. 내륙으로부터 떨어져 있고 희귀질환의 인구대비 유병률이 높은 제주로서는 희귀질환 관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전망이다.
그동안 지역 내 희귀질환자들은 검사 장비 및 전문가 부족 등으로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며 서울의 대형 의료기관을 찾아야 했고, 진단 이후에도 치료와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번 거점센터 확대 지정으로 희귀질환에 대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지역 내 희귀질환자와 그 가족의 의료서비스 및 삶의 질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제주한라병원은 앞으로 희귀질환자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희귀질환 관련 인력 교육지원 및 진료협력체계를 구축해 희귀질환자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희귀질환 진단·관리를 위한 희귀질환 전문 클리닉 운영 △희귀질환 관련 인력의 전문성 강화 △진료협력체계 구축 △희귀질환 교육자료 개발 및 지원 등의 사업을 수행할 예정이다.
앞서 제주한라병원은 극희귀질환인 소아조로증 환아에 대해 이미 한차례 진료한 바 있으며, 차세대염기서열분석기(NGS)를 포함한 첨단 검사 장비를 이미 들여왔거나 지속적으로 도입해나갈 계획이다.
희귀질환에 대한 투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다빈도 질환의 극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희귀질환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대개의 사망원인은 뇌심혈관 질병, 인지장애, 기능감소, 종양 등이다. 그런데 희귀질환자에게 있어서 이러한 병변은 증상의 강도가 높고 조기에 나타나므로 질병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선진국 성인의 다빈도 질병이 혈관질환인데 이러한 혈관질환의 대표적인 희귀질환의 예가 조로증과 항인지질증후군(자가면역질환으로 혈관에 혈전이 생겨 뇌혈관질환이나 심혈관질환을 일으키는 병)이다. 혈관질환의 치료는 아직 미완성으로 여전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희귀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연구는 보다 향상된 치료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김우진 진단검사의학과장>